[성명서]민변
    분류코드   Et0015
    자료형태   B5복사
    페이지   6
    언어   한국어
    저자   
    출처   민변
    하위분류   none
    발행일   1991년 05월 08일
 
□ 첨부파일 :  et0015.hwp
내용
성 명 서

1. 법정에서의 변론을 통하여 나름대로 민주화를 위하여 노력해온 우리들은 여당이 국가보안법의 개정안을 단독으로 강행처리하기로 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참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정부여당의 반민주적 처사를 규탄하면서 동시에 야당의 각성을 촉구한다.

2. 6월시민항쟁에 나타난 국민의 뜻은 인권유린으로 일관된 제5공화국의 법체제를 새로운 민주적인 법질서로 개혁하는 것이었고 국회가 국민의 뜻을 받는 유일한 길은 악법체제의 골간을 이루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국가안전기획부법을 크게 개정하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은 헌법의 위에 올라서서 온갖 인권유린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독재권력의 행사를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국가안전기획부법은 국가안전기획부로 하여금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국가기관 위에 군림하여 초헌법적 권력을 행사하게 하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의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와 상관없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보안법의 범위 안에서만 인정되었고 국가권력은 국가안전기획부의 권한범위 안에서만 조직되고 행사될 수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과 국가안전기획부법을 전면 개폐하지 않고는 민주화작업이 한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제도정치권의 현실적 한계를 아무리 크게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국회가 민주화를 향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하려면 국가보안법과 국가안전기획부가 헌법의 가치와 질서에 구속되도록 실질적인 내용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야당이 내놓은 개정안을 보면 이법들의 실질적인 내용은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치 큰 폭의 개혁이이루어지는 듯이 호도하여 국민을 속이려는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국가보안법의 개정안은 오히려 더 큰 인권유린사태를 몰고 올 가능성이 매우 큰데에 불구하고 오히려 큰 폭의 개정이 이루어지는 듯이 가장하여 공안검사들의 "반발"이라는 모습까지 연출하고 있는 데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그러한 개정에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뜻을 먼저 밝혀 두고자 한다.

3. 국가안보를 위하여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내용이 얼마나 나쁜가를 새삼스럽게 설명할 이유를 갖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1948년 이른바 "내란상황"으로 정권이 물리적인 위기에 몰린 시점에서, 더구나 아직 형법 조차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임시로 만들어진 비상입법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러한 "내란상황"에 대처하고자 한 원래의 국가보안법을 6개 조문의 매우 소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데도 불구하고 6.25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오로지 쿠테타로 집권할 세력의 정권안보를 위하여 더욱 강화되어 왔으며 그렇게 집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그동안 국가보안법 때문에 이른바 "북한의 위협"이 줄어든 일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남북한 사이에 전쟁의 위협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남한에 국가보안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계정세의 변동과 평화통일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 때문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4.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근대형법의 원칙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행위"만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적용에 객관성과 평등성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 확인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어서 결국은 수사기관이 처벌하고자 마음먹은 사람만을 얼마든지 차별적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아직도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여당이 강행처리하려고 하는 국가보안법개정안을 보면 국가보안법의 구성요건을 명확한 행위개념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말로만 그럴 듯한 추상개념을 덧붙이는 데 불과하여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저지할 도리가 전혀 없어 보인다.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행위"를 "국가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행위"로 바꾸어 보아도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각한 인권침해를 가져오는 조문들은 모두 그대로 두면서 별다른 효용이 없는 몇구절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만으로는 인권상화을 개선하고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에 어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그러한 몇구절의 수정으로도 의미가 잇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단지 6개의 간단한 조문만으로도 수만명의 사람을 처벌할 수 있었던 이승만정권을 기억하라고 충고할 수밖에 없다.

5. 수많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법정에서 변론해 온 우리는 막연히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국가보안법이 가져오는 심각한 피해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진진하게 고려해 보았는가.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미국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혹은 미래의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하여 정부당국자와 다른생각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그에게 국가보안법의 너울이 씌워질 때 벌어지는 인권유린, 가족과 주위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보았는가. 그리고 그렇게 질식되어 버리는 우리 사회의 창의성과 진취성, 민주적 분의기를 생각해 보았는가.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를 위하여 기여한 바가 도대체 무엇이 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유린하는 법에 의하여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자 한다.

6. 우리는 지금 이순간까지도 기존의 국가보안법 적용을 조금도 억제하지 않고있는 정부여당이 몇 개조문의 형식적인 개정을 힘으로 강행하는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정부와 여당은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조금이나마 억제할 뜻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 정도의 "개정"으로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국가보안법을 계속 휘드를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인가. 만일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인정하고 있다면 왜 지금 당장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중지하고 구속자를 석방하지 않는가. 또한 개정안의 부칙에서 구속자의 석방을 배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함께 우리는 야당에도 묻고자 한다. 현재의 국가보안법을 그다지 개선하지도 못하는 개정안을 내놓고 밀실작업을 통하여 여당과 합의하려고 서두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럼으로써 인권상황이 실질적으로 개선되리라고 믿는가. 아니면 내용이야 어쨌든 "야당이 노력해서 국가보안법을 개정했다"는 허울좋은 명분이 필요한가. 야당 총재의 피고인 신분을 벗기기 위해서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그 아래 유린되는 국민들의 인권에 대하여는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는가. 야당은 지금 "민주화의 길"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7. 국가보안법의 적용현장에서 국가보안법과 맞닥뜨려 온 우리들은 정부여당은 물론 야당에 대하여 지금의 국가보안법을 차라리 그대로 두어 달라고 요구한다. 이미 무디어질대로 무디어진 국가보안법의 녹슨 칼날을 국회의 개정을 통하여 시퍼렇게 날이 선 새로운 칼날로 바꾸는 것 보다는 13대 국회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장래의 민주화 작업을 손쉽게 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8. 이미 날치기 통과의 전과를 가지고 있는 여당이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을 그대로 둔 채 물리적인 다수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개정안을 강행통과시킨다면 그것은 국회입법의 허울을 쓴 새로운 법에 의해 구속된 정치범으로 이나라의 감옥을 채우려는 음모일 뿐이다. 그러한 개정은 정부여당이 스스로 내세우는 의회주의적 형식적틀 조차 짓밟아버리는 반민주적 반역사적 폭거일 뿐이다. 결국 더 큰 인권유린 사테를 초래하고 국민들의 저항울 불러 일으킬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정부여당에 대하여 기만적인 악법개정작업을 즉시 포기하고 새롭고도 전면적인 개혁과 민주화를 위하여 나설 것을 촉구한다. 또한 야당에 대하여는 원칙없는 눈가림의 타협으로 일관하지 말고 국민의 편에 서서 정부여당의 폭거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한다.

실질적인 개혁이 없는 눈가림의 국가보안법 개정은 결코 악법개폐작업의 종결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나마 주어진 제6공화국 정부와 국회의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악법개폐를 위한 전국민의 새로운 저항의 시작을 가져올 뿐이다.
1991. 5. 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표간사 황 인 철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